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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된 생명 (요일 01:1-4)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쓴 편지입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우리 주님을 가리킨 것이고 그분을 가까이에서 따르고 그분의 생애를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의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명백한 사도적 증언이 요한일서 첫머리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을 읽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갖게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용어, 문체, 형식과 아주 비슷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 태초, 말씀, 증거, 빛, 사랑, 믿음이라는 말이 자주 나타나는데 요한일서에서도 같은 낱말들이 쉴새없이 강조되며 거듭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쓴 이와 요한일서를 쓴 사람이 같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편지를 왜 쓰게 되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요한일서를 깊이 살펴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편지라기보다는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앙적인 성숙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를 읽노라면 “자녀들아” 혹은 “아비들아”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가족적인 용어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앙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그들의 신앙을 확실하게 세워주기 위해서 이 책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교제를 격려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제는 수직적인 교제와 수평적인 교제,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와의 교제를 모두 격려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교제라는 단어가 직접 나타나는 것은 네 번밖에 없지만, 교제의 정신이 사랑이라는 단어와 같이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와의 교제, 이 놀라운 교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을 직접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교제가 없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고독해 하며 다 외따로 떨어진 하나 하나의 인간 섬처럼 소외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코이노니아, 교제의 영성,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릴 수 있는 이 놀랍고 풍성한 교제를 격려하기 위하여 쓴 편지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승리의 삶을 격려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2장 1절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씀은”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쓴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아니 범죄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받고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어느 아이가 잘못해서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아버지가 매를 들려 하는데 아이는 어머니한테 가서 “어머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하면서 품에 안깁니다. 어머니가 매를 든 아버지에게 “여보, 얘가 잘못했대요. 다시는 안 그런대요. 용서해 주세요”하면서 아이를 가슴에 꼭 안으면, 어머니 가슴에 안겨 있는 애를 빼앗아 때리는 아버지가 있을까요? 노를 풀면서 “다시는 그러지 마”하고 용서합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이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가 되셔서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제가 이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고 대신 죽지 않았습니까?”
로마서 8장 1절에 뭐랬어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용서와 승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는 적그리스도를 경계하고 바른 그리스도관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요한일서 2장 26절에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고 탈선시키려는 사단의 역사의 정체를 포함해서 우리의 신앙을 보호하고 올바른 신앙, 올바른 그리스도관을 정립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2장 18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은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했습니다.

말세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역사를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역사는 종말론적인 그 완성을 향해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인 종말론적 징조 가운데 하나가 적그리스도들의 나타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참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혹됩니다. 요한일서 2장 22절을 보세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 역사에 나타난 모든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중에 하나만을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든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든지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꼭같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참으로 사람이십니다. 교회사의 모든 이단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완벽한 중보자가 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의 이단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던 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위 예수님의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실제로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시간이 흘러간 후에 소위 영지주의라는 강력한 이단 사상을 만들어 내게 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그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것으로 사상적인 근원을 이루는 혼합주의자들이었습니다.
더불어 그들은 그리스도를 명백히 부인했습니다. 이들은 이원론자들이었습니다. 영혼과 육체를 엄격히 구별해서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더러운 것이고 영혼은 깨끗하고 신령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상에서 본다면 구세주로 오실 그분이 어떻게 더러운 육체를 입으시고 오실 수가 있겠는가 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요소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요소인 영혼으로 인간을 지으셨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이 두 가지는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직관적인 지식을 아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노시스’란 말은 ‘안다’는 헬라 말인데 그들은 아는 것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 편지에서 ‘안다’는 동사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이 ‘안다’라는 단어로 우리를 혼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참으로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과 육체의 세계, 하나님과 육체의 세계를 완전히 구별한 다음 더러운 육체를 가지고는 영에 속한 것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소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만이 그런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은 사상에 대항해서 사도 요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었습니다.

요사이 우리 주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무리 가운데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많이 강조하면서도 그 구원이 마치 자기 단체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믿음을 어떤 신비한 영적인 깨달음으로, 그 용어와 의미를 국한시키려는 데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의 믿음이지 특정한 영적 체험을 동반한 어떤 규격에 짜여진 인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말하자면 현대판 영지주의가 이 땅에 다시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적그리스도를 경계하고 바른 그리스도관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이 요한서신을 강해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요한일서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여기서도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 안에는 영생이 이미 주어졌다는 그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안다’라는 단어가 요한일서 전체에 약 40번 나온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안다’는 말을 강조했을까요? 그것은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고, 참된 앎이 무엇인지 알며, 또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을 안다는 확신 위에 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알고 요한일서를 읽게 되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읽게 되면 크게 눈에 띄는 세 낱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빛’이란 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커다란 세 산맥을 통해서 총 주제를 설정할 수 있다면 “참되신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말씀으로 만물을 섭리하시고 붙드시는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과 이렇게 교제하며, 그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이 벅찬 삶을, 그 풍성한 삶을 요한일서를 생각해 내려가는 가운데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생명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빛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논리는 생명이 빛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요한일서도 생명과 빛의 관계에 대해 생명이신 주님을 말하고 그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발하시는 그 놀라운 빛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생명이신 주님을 증언하는 첫 부분에 나타나는 몇 가지 중요한 단어를 보면 1절에 “나타나신 그분을 보았다, 들었다, 만졌다” 했습니다. 2절에 그분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 “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명이 나타났다,” “이 생명은 체험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생명은 증거되었다,” 또는 “전달되었다”고 세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1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이라고 불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과도 같습니다. 바로 그 말씀, 로고스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은 “말씀”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우리 속에 있는 생각과 사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씀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말했을까요? 그리스도는 누구를 나타내며 무엇을 나타냅니까?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다시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뭐랬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철학을 깊이 연구해서 절대자를 찾으려는 철학자의 사상이라 해도 하나님의 존재는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학교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무식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으로 하나님을 보고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습니다. 태초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신 그 생명의 말씀이 아주 분명하게 계시되고 증언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속에 그 생명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둘째로, 이 생명은 체험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우리에게 지각을 주셔서 알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1장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세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구체적으로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접촉이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을 영적으로 체험했다는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을 믿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체험한 그 구세주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5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는 육체적인 체험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세주로서 그 믿음이 가져다 준 체험적인 증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주님을 참 구주로 믿을 때까지는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체험이 있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체험이 있으면 믿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체험이 믿음을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계기는 될 수 있지만 체험이 믿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믿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체험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그리스도를 체험한 그 영광스런 사실을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난 자마다”라는 표현이 여섯 번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것을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났다는 말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은 믿었기 때문에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체험이 있습니까? 여러분도 거듭났습니까?

셋째로, 이 생명은 증거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거듭난 증거를 여기서 몇 가지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2장 29절에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했습니다. 내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의를 행하기를 원하는 참된 열망이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한 증거입니다.

둘째로, 3장 9절에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중생한 사람마다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로 태어난 자는 죄를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지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거하기 때문에 죄를 계속 범하도록 자기 속에 있는 성품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죄를 범하면 죄를 자백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마자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다른 사람들이 나의 형제임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수평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만나면 남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중생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수직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로, 5장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내적인 확신입니다.

여섯째로, 5장 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했습니다.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승리의 자리에 서기 시작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삶을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중생의 증거를 생활 면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면에서 체험도 아니고 지식도 아닌, 우리의 삶만이 중생의 사실을 입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째로, 5장 13절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면 영생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만족할 만큼 신앙의 성숙이 없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내 생활 속에 이런 사건들이 나타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간증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삶의 놀라운 변화들을 체험한 내 속에서 의를 사모하고, 습관적인 범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다른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움트고, 주님을 계속 나의 구세주로 믿는다면 이 얼마나 위대한 변화입니까?
그러므로 이와 같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준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사도 요한의 심정이었습니다. 1장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했습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보고 들은 바를, 인격적으로 부딪치면서 체험한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전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사랑스러운지 그 놀라운 교제에 초청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순결한 마음으로 나누는 교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의 교제를 소개하고 싶어서입니다(시편 138:1). 하나님과의 교제를 아는 사람, 성도와의 교제의 비밀을 아는 사람만이 전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위대한 친구이십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우리의 친구로 소개한 것을 보면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더구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그래서 전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전도해야 합니까? 기쁨이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전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더구나 내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고 한 영혼이 변하는 그 감격, 그 기쁨 때문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재미가 아무리 좋아도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하는 기쁨, 인간의 변화를 바라보는 기쁨, 이 놀라운 기쁨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고독하며 아픔과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도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이 놀라운 삶의 보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전도의 기쁨을 맛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