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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구영신]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도우셨다(삼상 7:12-17)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1026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도우셨다(삼상 7:12-17)

제가 지난 성탄절 오후에 최은주 집사님으로부터 조용히 들은 이야기입니다. 최 집사님이 아가씨 시절에 우정현 집사님하고 데이트를 할 때의 이야기인데 1급 비밀이라고 하면서 제게 들려 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우정현 집사님이 최은주 집사님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부산 광안리 바닷가의 어느 커피숍으로 들어섰습니다. 찢어진 청바지에, 청잠바 깃은 빳빳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우 집사님은 머리를 약간 숙인 채 강렬한 눈빛을 발산하면서 최 집사님이 있는 자리로 걸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크림에 미끄러져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면서 테이블에 이마를 '쾅!' 박고 말았습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 집사님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크림을 살짝 줍더니 말했습니다.
"여긴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잖니."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최 집사님 옆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마음이 약한 최 집사님이 우 집사님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랬더니 우 집사님이 이마의 피를 슬쩍 닦으면서 아주 느끼하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안에 있으니 답답했던가 보군."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다 귀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도와주셨다"라는 말씀처럼 귀한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금년 마지막 송년 주일에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 시간 서로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집사님,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와 주셨어요."
서로 인사하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의 힘이 위대합니다. 생각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앙이란 결국은 자기의 생각을 제어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맨 마지막 열매가 절제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어떤 시련,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다 붙들어 맬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그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이 벌써 생각이 흐트러지면 다른 것들도 다 흐트러지고 맙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정말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어려운 때일수록 아름다운 쪽을 보아야 됩니다. 힘든 때일수록 좋은 점을 보아야 됩니다. "정말 내가 겨우 이것 밖에 안되나? 한심한 것" 그렇게 자책하거나 자학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일수록 지난날이든 지금이든 자기 속에 숨겨 있는 좋은 점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귀하게 여겨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사단은 우리의 생각에 가라지를 뿌리고 갑니다. 그러나 참새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참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이 내 생각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가라지를 뿌리고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라지가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생각이 가는 대로 그대로 놔두면 안됩니다. 그러면 나는 생각에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나는 수시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동물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름철에 홍수가 나서 물이 막 흐르는 그대로 놔두면 논과 밭을 다 버립니다. 애써 기른 농작물이 다 죽습니다. 생각도 똑 같습니다. 내 생각이 막 흘러갈 때 그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 나를 절망의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때에도 생각을 제어할 수 있는 통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의 줄을 계속 붙들고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더 큰 비전과 꿈을 안고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결코 환경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배움의 희생자도 아닙니다. 실력의 희생자도 아닙니다. 인간을 제일 먼저 희생시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습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성격의 희생자도 아닙니다. 배움의 희생자도 아닙니다. 환경의 희생자도 아닙니다.

자기 습관의 희생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습관은 절대로 태어나면서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은 선천적이 아니고, 후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습관은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습관과 자기 자신을 분리해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매사를 늘 낙관적으로 보십시오. 언제나 창조적으로 보십시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이 언양 영신제단은 우리의 삶의 희망의 발상지이고, 우리의 삶의 생명의 터전이 되는 곳입니다. "내가 여기에 오면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이 언양 영신제단을 통하여 나와 내 가정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릴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예언을 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 말이 씨가 됩니다. 예언대로 됩니다. 자주 예언을 해야 됩니다. "아이구! 주일날 또 나가야 되나?" 그러지 말고 "여기 언양 영신제단에 나가면 생명의 씨를 얻는다." "여기에 나가면 복을 받는다." "희망을 얻는다." "믿음을 얻는다." 자주 입으로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꿈을 이루기 전까지 그 꿈을 꾸는 사람을 무던히도 가혹하게 다루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모세를 보십시오. 꿈을 이루기까지 꿈을 꾸고 있는 그 사람은 그 꿈이 얼마나 그를 가혹하게 다루는지 모릅니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까지 그 꿈이 주는 가혹한 형벌 같은 고난의 길을 가야 됩니다. 그것을 통과해야 됩니다. 다 그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인생길에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더 높고 더 넓은 세계를 바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치면 안됩니다. 낙심하면 안됩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내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게 할 그날이 오리라!"
이것이 제 신앙 고백입니다. 이것이 제 목회 고백입니다. 이것이 제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어려움 가운데 떨치고 일어났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용기를 얻겠습니까? 우리의 몸된 이 성전이 부흥되어서 이 자리가 가득 차고 넘치는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많은 교회와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꿈과 희망을 붙잡겠습니까? 언양 영신교회도 저렇게 부흥했는데. 보잘 것 없는 오주철 목사도 저렇게 목회를 했는데.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속에서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희망의 공급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삶을 통해서, 내 헌신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가슴을 활짝 펴십시다. 다같이 크게 한번 따라서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공급자가 되리라."
"소망의 공급자가 되리라!"
"사랑의 증거자가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한 생명으로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 삶에 무엇인가 있어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이야 누구나 합니다. 자기 먹고 자기 입고 자기 타는 것이야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면 얼마나 억울한 인생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에 가슴 설레십시오. 이 시간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가슴이 두근 두근 거리십시오. 그 뿐만 아니라 인생에도 하루의 중요한 경험이 몇 년을 산 것보다도 훨씬 중요한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루 한 시간의 중요한 경험이 몇 년을 산 것보다도 훨씬 중요한 때가 있습니다. 훨씬 중요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날이 그 날입니다. 하루에 만나는 사람과의 그 만남의 한 순간이 그렇게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이 그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는 일에서 지금보다 앞으로 우리가 모르는 더 큰 보람과 감격과 기쁨과 그런 용솟음치는 소망이 있는 날이 있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 따분합니다. 비참합니다. 불쌍합니다. 불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주일동안 일하다 왔습니다.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 이것처럼 분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처럼 따분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보다 큰 뜻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더 큰 뜻을 위해서 일한다고 그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일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일이 즐겁고 감격스럽습니다. 하는 일이 신바람 나고, 그 일에 집중이 됩니다. 아무리 고된 일이라고 할지라도 피곤도 모르고 일을 사랑하게 됩니다. 보람을 갖고 성취감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일에 끌려가지 말고, 그 일을 끌고 가는 내면의 힘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의 결과가 나와 내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여와 유익이 돌아간다고 하는 큰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귀한 눈을 뜨십시오. 삶의 행복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나는 사고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삶의 성공은 우연한 사고가 아닙니다. 인생의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자동차 사고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그냥 살다보면 어느 날인가 갑자기 행복한 날이 올거야. 천만에, 아닙니다. 무슨 습관, 무슨 습관해도 마음의 습관이 제일 중요합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그 마음에 있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다시 힘입고 행복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내가 다시 행복을 바라보리라. 내가 다시 주의 기쁜 날을 바라보리라. 내가 다시 주께서 준비하신 그 날을 바라보리라! 마음을 그 쪽으로 다시 모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시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시간 그 시각을 다시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기에 물 컵이 있습니다. 유리잔이 아니라서 안 보입니다마는 어떤 사람은 이 물 컵을 보면서 그럽니다. "겨우 반 잔 밖에 없네." 이렇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겨우 반잔이야" 이런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안절부절 합니다. 반대로 "아직 반잔이나 남았구만, 아직 반잔이나 있네!" 이런 사람은 매사에 고마워합니다. 매사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다행스럽게만 생각합니다. 언제나 그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 마음에 풍요와 넉넉함이 있습니다. 표정이 밝습니다. 표현하는 그 표현력이 언제나 부드럽습니다. 표현하는 그 언어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몇 년 믿었다는 것을 절대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공식을 모르는 사람은 학교를 몇 년을 다녀도 죽을 때까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교회를 아무리 다니고, 성경을 몇 번 읽고, 내 신분이 누구라는 것을 절대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내가 내 삶에 지난날 알지 못하던 깊은 영적인 원리와 원칙을 깨닫고 일어나는 삶에 대한 자유! 여기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시각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내게 일어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어난 일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다 외우는 공식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를 보는 내 방식이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보십시오. 다시 믿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소망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넉넉히 이기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은혜를 받고 나가면 당장 내 표현이 달라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당장 내 삶의 심령이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불행도, 모든 비극의 시각도 결국은 반응의 잘못에서 시작됩니다. 내 반응이 잘못 되면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고난에도, 어떤 역경에도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 한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이 다시 나를 도우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다 무너집디다. 인간은 정말 마지막 극한 상황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무너집니다. 공부한 사람도, 젊은 사람도 무너집니다. 돈 있는 사람도, 든든한 사람도 다 무너집니다. 재능도 지식도 마지막 그 인격마져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극한 상황에서는 송두리째 다 무너지고 맙니다. 거의 동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만은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자신의 마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것만은 누가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만은 누가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사탄이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다 무너진 순간에도 이 마지막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통하여 기어이 증거하게 하십니다.

오늘은 참 좋은 날씨입니다. 좀 춥기는 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입니다. 이런 날에는 뭔가 능률이 더 날 것 같습니다. 이런 날에는 뭔가 발걸음도 더 상쾌합니다. 이런 날은 정말 기분도 좋습니다. 이런 날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내 마음도 넉넉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좋은 날만 매일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둥치는 날도 있고, 비구름 끼는 날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날씨를 우리가 만들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날씨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씨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자세는 내가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나쁜 날도 좋은 날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 공식을 알아야만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씨는 선택할 수 없고, 만들 수도 없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내 마음의 날씨는 내가 만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날씨를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어 매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꽉 붙들어 매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자기를 형성하는 이 힘!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를 형성하는 이 위대한 힘을 가지고 왜 자신을 허무는데 쓰십니까? 왜 남을 비판하는데 쏟으십니까? 왜 불평과 원망에다 그 힘을 쏟아 부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더 강하게 자기를 형성하는 데다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건강한 자기 자아를 만들어 가는데 쏟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인 우리는 일마다 때마다 우리 속에 나타나는 모든 두려움과 염려를 정복해야 됩니다. 모든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두려움을 정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두려움을 정복해야 됩니다. 사탄은 끝없는 두려움을 주지만, 하나님은 끝없는 믿음을 줍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끝없는 두려움을 공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끝없는 믿음을 공급하십니다.

"딸아! 믿음을 가져라." "아들아! 믿음을 가져라!" "산을 옮길 믿음을 가져라. 귀한 믿음을 가져라. 복된 믿음을 가져라. 믿음을 가져라! 네 믿음대로 되느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면 모든 두려움을 정복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신 손길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면 두려움을 정복하는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도전하고 시도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거절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잘 될 때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거절과 수많은 실패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기도를 놓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한번도 그 입에서 떠나지 않았던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지키셨다. 나의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보호하셨다.

사무엘은 사실 이 땅에 태어나는 과정 자체가 좀 특이합니다. 사무엘은 우리가 잘 알듯이 한 시대, 민족의 마지막 선지자로 최후의 사사시대에 등장합니다. 어머니가 아무리해도 아들을 얻을 수 없어서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금식하면서 아들을 달라고 며칠 몇 날을 뒹굴며 울었습니다. 옆에 지나가던 엘리 제사장이 야단을 칩니다.
"이 여인아, 여기가 어디라고 술을 먹고 술 주정하느냐?"
그럴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뒹굴었습니다.
"하나님! 아들 주세요! 하나님! 아들 주세요!"
우리에게는 그런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매달림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적당한 매달림은 안됩니다. 생명을 건 매달림이어야 합니다.

이 여인에게는 그런 아들을 얻고자 하는 그런 간절한 매달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얻자마자 '기도로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아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잘 키우고 싶겠습니까? 얼마나 보람되게 키우고 싶겠습니까? 얼마나 역사에 바른 인물로 키우고 싶겠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을 왜 고등학교에 보내고 대학을 보냅니까? 내 아이가 보다 더 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역사에 보다 바른 인물로 키우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자식을 향한 이 마음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어머니 한나는 그 아들을 실로에 있는 엘리에게 데려가서 맡겼습니다. 엘리가 그를 정말 귀하게 정성껏 잘 길렀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자는데 하나님이 불렀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처음에는 이 영음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사무엘은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저를 부르셨습니까?" 또 사무엘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안 불렀다."

세 번째 또 부릅니다. 또 좇아가니까 이번에는 엘리가 깨닫고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의 시대는 끝났고 너의 시대가 왔으니, 이제 또 부르시거든 나에게로 오지 말고,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시옵소서!' 그렇게 말하거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하나님의 주역들은 바뀝니다. 하나님의 귀하고 아름다운 인물들은 자꾸 일어납니다. 여러분, 미래라고 하는 것은 복이지만, 미래의 인격을 준비하지 못한 민족의 미래라고 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고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가 없는 교회,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못하는 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교회 학교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교회 학교의 부흥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봉사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이 제단에 하나님이 약속한 그 역사를 오고 오는 세대에 한 번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무엘은 정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거절과 그 많은 비판과 그 많은 어려움과 그 많은 아픔 앞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했습니다.

그런 중에 나라에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는 나라의 군인들이 쳐들어와서 뺑 둘러싸는데 이것이 속수무책입니다. 무슨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네 힘으로는 어떻게 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밖에 없어서 미스바 계곡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일어납니다. "아니, 지금 적군이 쳐들어 왔는데 나가 싸워야지 미스바에 엎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런다고 이게 되는 것이냐? 다 죽이려고 하느냐?" 여기저기서 불평과 불만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블레셋 적군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 계곡에 모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첩첩이 둘러싸서 총공격을 합니다. 좌를 봐도, 우를 봐도 사방 팔방에 적군의 함성뿐입니다. 이제 다 죽게 됐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이 속수무책 앞에서 그들은 절규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죽이려고 이곳에 모았느냐!"
여기 저기서 불평이 일어났습니다. 원망이 일어났습니다. 아무 대책도 무슨 방법도 없습니다. 전부 무장 해제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다가 이런 꼴을 당했으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불같이 일어나는 바깥의 적군의 침공보다도 불평과 원망이 불같이 일어나는 내부의 무너짐이 더 힘들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불평과 원망이 불같이 일어나는 그 사람들에게 사무엘이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됩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여기까지 도와주신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어야 됩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기도하는 그들 앞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우뢰와 천둥이 적군에 떨어졌습니다. 혼비백산한 적군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 물러갔습니다. 전쟁은 별로 싸워 보지도 않고 승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내 마음대로 못하듯, 하나님 안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기적의 주인공들이라고 합니다. 기적의 역사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제 자신이 이 기적을 알고 있는 주인공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에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하고, 이 말씀을 증거 할 때 너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 말씀을 선포할 때 너무너무 확신에 차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아무쪼록 하나님의 사랑의 주인공을 선언할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같이 힘차게 외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다!"

삶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외칠 수 있는 마지막 기도, 나의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와 주셨으니 이제 다시 도와주리라. 내가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붙들고 나가면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도와주시리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의와 정직은 반드시 이룰 날이 있습니다. 진리에는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고, 정의와 정직에는 반드시 이루고 승리할 날이 옵니다. 나도 믿음의 주인공이 되리라! 내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는 그런 삶을 한번 만들어 보리라!

하나님! 이 생명 한번 도와주세요. 머리를 숙여보십시오. 하나님! 이 생명 한번 도와주세요! 하나님, 정말 이 생명 한번 도와주세요! 나처럼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내 인생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어렵게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공급자, 믿음의 조달자가 한 번 되겠나이다. 주여! 여기까지 도우신 주여! 의지합니다. 도우시옵소서!

 

기다리는 사람(눅 2:2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