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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구영신] 버리고 나아갈지라(히 6:1-3)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1028    

버리고 나아갈지라(히 6:1-3)

나폴레옹이 그 어느 날 옷을 입혀달라고 부관에게 부탁을 합니다. 옷을 입혀주고 있는 부관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옷을 좀 천천히 입히게, 지금 나는 바쁘단 말일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바쁘시답니다. 그러나 옷은 천천히 입히랍니다.
여러분, 그 심정을 알겠습니까? 그 속셈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바쁜 때일수록 더 침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옷을 입히는 사람까지 서둘러 댄다면 이젠 정말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지금 바쁘네. 옷을 천천히 입히게." 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숨가프게 한해를 지내오면서 이젠 조용히 매듭을 지어야 하는 길목에 서 있습니다. 무엇을 이루었으며 어떤 것을 잃었습니까? 년 초에 계획하고 년 말에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감정은 희비가 엇갈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지구는 여전히 돌아갑니다. 어김없이 돌아갑니다. 조금도 편차가 없이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오늘은 2006년12월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12시간) 지나면 2006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2007년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때, 잘못된 것이나 버려야 할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쉽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의 성장, 즉 신앙의 진보를 위해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나아가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오늘 읽은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초보를 버려야 합니다.

신앙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와 같아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해야 함을 강조한 말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11절 말씀에 보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믿음의 초보를 버린다고 했을 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초보를 버린다고 할 때 기초를 버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건물도 기초를 하지 않고는 세울 수 없듯이 신앙의 기초가 없이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초보를 버리란 의미가 무엇인가?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젖을 떼면 이유식을 합니다. 이유식을 하다가 성장하면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어른처럼 아무 것이나 먹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것, 말랑말랑한 것을 먹습니다. 단단한 것, 여문 것을 먹기가 어렵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어린 신앙에서 장성한 신앙, 즉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초보를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모습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기저귀를 벗어야 합니다. 믿음의 생활을 시작할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필요하고 부활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세례와 안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리를 깨달았으면 이제는 교리를 아는데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초는 한번 치면 됩니다. 기초를 두 번 세 번 하지 않습니다. 기초는 한번으로 족합니다. 교리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의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란 교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졌으면 이제 교리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기초로 해서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1학년은 더하기 빼기 하다가 4학 년쯤 되면 곱하기 빼기를 합니다. 5,6학년이 되면 분수를 셈하고 중학교에 올라가면 인수분해를 합니다. 고등학교에 가면 미분 적분을 공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초보를 버리라고 한다고 해서 이들이 더하기 빼기와 곱하기 나누기와 분수에 관한 공식과 인수분해를 몰라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제 고등학교 학생이 되었으면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는 자동적으로 다 알고 이제는 미분 적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문제를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의 초보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하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에 치중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는 자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장했다는 것은 말씀의 적용능력이 향상됨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부터 벗어 던져야 합니다. 예컨대 아직도 주일성수가 걸림돌이 되고 잘 안되어서 고민을 한다면 이것은 빨리 벗어던져야 합니다. 신앙의 가장 초보가 주일성수입니다. 세례를 받고 서리집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경을 제대로 찾을 줄 모른다면 이제는 그런 초보는 벗어던져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 67권을 잘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교역자를 선정하는데 면접을 보면서 성경을 놓고 찾으라고 했습니다. ‘오바댜’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전도사가 오바댜를 찾는데 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청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도를 시킬 때 기도를 제대로 못한다면 이런 초보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보다 잘 설명한 곳이 히브리서5장12절 이하에 있는 말씀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너무 답답한 심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는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역자의 고충입니다.

목사의 고민거리입니다. 이제는 정말 앞장서서 섬기며 본이 되어 가르치는 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누군가가 밥을 떠먹여야 할 정도가 되어 있다면 답답한 노릇입니다. 언제까지 따라다니며 밥을 먹여야 합니까?. 혹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더라도 2007년 새해를 앞둔 오늘 우리는 과감하게 벗어던지도록 합시다. 믿음의 초보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이런 고백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빌립보서3:12-14절에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아직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완전히 얻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이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좀 어린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과감하게 벗어버립시다. 우리 주님은 믿음의 초보를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예배를 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예배만은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초보의 신앙은 자신의 형편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니 예배는 항상 뒤로 밀립니다. 예배를 귀하게 여기면 저절로 주일성수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날 현대인들은 주일성수가 약화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시길 바랍니다. 주일을 생명처럼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예배에 참여합시다. 구원받으면 된다는 것, 천국가면 된다는 초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모이기를 힘쓰는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을 제일주의로 삼아야 합니다.

헌금생활에서도 초보에서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주일헌금과 십일조는 초보입니다. 초보를 붙잡고 전전긍긍하면 곤란합니다. 지금까지 하지 못한 분들은 새해부터는 하십시오. 물질의 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정직하게 하시고 성실하게 하십시오. 말씀이 나왔으니 하는 말입니다. 며칠 전에 국세청에서 전국의 교회들에게 협조공문을 발송했습니다.

기부금 명세를 정직하게 떼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명세서를 떼어준 후에 그 증거 서류를 5년 동안 보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헌금을 할 때 실명으로 하셔야 합니다. 주보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봉투에 이름을 쓰신 후 “주보에 기재하지 마세요”라고 쓰면 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고 한만큼 공제받도록 해야 합니다. 덜하고 공제를 많이 받으려고 하면 두 가지 죄를 범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은 것이 되고 다른 하나는 위조가 됩니다. 내 이름으로 해 놓은 것은 아들 이름으로 해달라고 하는 것은 안됩니다. 부부가 함께 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부부의 이름을 공동으로 기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총 금액을 두 사람이 나누어 서류를 요하면 금액은 반반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10만원 해놓고 아내도 남편도 각각 10만원씩 떼어달라면 그것은 이미 거짓이 됩니다. 헌금하는 일에 진보하십시오.

기도하는 일에도 초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식사할 때 30초 기도하는 것, 생각나면 기도하는 것, 문제가 발생하여 불이 발등에 떨어지면 기도하는 것, 특별새벽기도회 때 하는 기도생활은 초보에 불과합니다. 자신중심으로 기도하는 것도 기도의 초보입니다. 이제는 기도하면 10문은 거뜬히 해내고 한 시간도 하고 새벽기도 금요기도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진보입니다. 어려운 일이 없더라도 기도하고 자신의 기도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많다면 이것은 기도생활에 진보한 것입니다.

봉사하는 일에 진보하십시오. 억지로 하지 말고 항상 자원하십시오. 봉사도 즐겁게 감당하십시오. 최선을 다하십시오. 아예 봉사를 하지 않거나 억지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감당하십시오.

전도하는 일에도 초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복음전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하는 초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되어서 ‘전도합시다’ ‘전도축제’등을 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초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적 생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둘째, 죽은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초보에 머물게 하는 것이 죽은 행실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은 행실’이란 믿음을 가지기 전에 행하던 모든 악행들을 말합니다. 즉 지옥으로 이끄는 모든 악행들, 반드시 회개하여야 할 죄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지 못하는 모든 죄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만이 받아야 할 영광을 탈취한 죄를 슬프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버려야 할 죽은 행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개인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아직도 나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방해하는 죽은 행실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 새해를 맞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과감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히브리서9장 14절 말씀에 보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살고 회개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금년 한 해 동안 당신께서 아직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며 벗어버리려고 했던 죽은 행실은 없습니까? 아직도 죽은 행실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오늘 이 시간부터 새해의 첫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여 버려야 할 행실, 즉 회개해야 할 행실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어떤 목사님은 어게인 1907년 부흥운동을 위하여 100가지 회개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는 성장과 변화, 열정이 사라진 형식적인 신앙생활,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으면서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 불순종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No'라고 하면서, 내 뜻에 대해서는 'Yes'였음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위탁받은 시간과 물질, 지식과 재능 및 은사를 잘 관리하지 못했음을,
형제자매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주었던 것,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보다는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따라 행동했던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분의식을 드러내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던 것,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라에 대해서는 나라의 모든 책임을 대통령과 정치권에 맡기고 기도하지 못했음을
정직과 신용, 균형과 질서가 땅에 떨어진 사회의 총체적인 아픔을
온 오프 라인을 막론하고 독버섯처럼 범람하는 음란 문화에 동조, 방치한 죄
자살과 낙태, 인간복제 등 생명경시 풍조와 이로 인한 온갖 범죄를 묵인한 죄를 회개합니다.
욕심과 폭력, 편법과 불의, 기만과 갈취로 얼룩진 이 나라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사치와 낭비로 얼룩진 관혼상제를 회개합니다.

민족에 대해서는 오늘날 기도하기를 쉬었던 죄와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아야 할 우리 민족이 오히려 자국민 안에서조차 상대방이 잘되는 것을 축복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음성을 구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며 술취함과 방탕, 탐욕과 게으름에 빠져있던 한민족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학벌숭배, 물질만능주의, 한탕주의의 죄악을 회개합니다. 과거 한민족끼리 서로 총칼을 겨루며 증오하고 피흘렸던 죄를 회개합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많은 죄목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도덕적 주도권 회복의 선두에 서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하나님의 경고를 보면서도 교회가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기도의 제물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영혼 구원과 부흥의 회복을 위해 교회가 산고의 고통과 수고를 감내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각종 사회비리에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가리운 죄를 회개합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향해 사랑의 대계명을 온전히 준행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교회가 외적 성장에만 치우친 나머지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합니다. 해방을 주신 한 분 하나님을 잊고, 교단적 분열 속에서 민족을 찢었던 분열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 외에도 나 자신과 가정, 교회가 회개와 부흥에 관심이 없었음을 회개해야 하며, 나 자신과 가정, 교회를 성령님께 100% 맡기고 신뢰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 가정, 교회가 대 사회적으로 도덕적 주도권을 잃었음을 회개합니다.

여러분을 영적인 삶에서 멀도록 만들고 죄악가운데로 인도하는 일들이 있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회개를 한다는 것은 요식행위가 아닙니다. 회개가 왜 중요한가 하면 회개하면 용서받고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고 성령을 받으면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우리의 영적 삶이 부흥하는 것도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은혜받는다고 하는데 은혜받는 것에는 항상 회개가 따릅니다. 회개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은혜는 감격이 없습니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회개는 힘이 있습니다. 회개는 치료해 줍니다.

John Chrysostom은 “죄의 불꽃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눈물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왜냐하면 눈물은 허무의 용광로를 끄며 죄의 상처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난 어거스틴(354-430)은 어느 날 자신을 '정욕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여인과 마주치게 되자 목례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저를 모른 체하긴가요? 보세요. 저예요."
여인이 어거스틴을 붙들고 말하자 그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제 나는 더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랍니다."
후에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나태나 유혹을 봉쇄하는 사람은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도의 초보를 버리고 잘못된 행실,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터를 다시 닦지 않고서 완전한데로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이 항상 제자리 맴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진보해야 합니다. 발전해야 합니다. 성장해야 합니다. 성숙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에 보면 “완전한 데 나아갈지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4장13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의 의지만으로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결단만으로 안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잘 넘어집니다. 작심삼일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성령님이 도우시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지가 얼마나 강합니까? 그런데도 잘 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시간에도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야지, 버려야지, 죽여야지, 회개해야지, 반드시 할거야,’ 하고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서 흐지부지 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변하되길 원합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악한 행실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온전한데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초보적인 신앙행태를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잘못된 악한 행실은 회개하고 버리십시오. 그리고 온전한데로 나아가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입니다. 새로운 2007년을 맞이할 때는 보다 완전한데 나아가는 계획을 세워서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기다리는 사람(눅 2:25-39)